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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승일, 「푸른 방 (외)」평설/ 이재복퍼온시, 글 2016. 1. 5. 15:26
박승일, 「푸른 방 (외)」평설/ 이재복
푸른 방 (외 4편)
박승일
완강한 병의 뚜껑을 따고 들어가면
매끄럽게 굽은 안팎 어디엔가
푸른 요람 하나 옹알거릴 것 같아
병목을 지나 묏등 같은 낭떠러지 저 끝 어딘가
꼭 한 번 누워보고 싶은
청색의 방 하나 있을 것 같아
병이 비워질 때마다 기우뚱
잦아드는 몸을 들이밀고 하나 둘 셋
낙하 신호를 손꼽아 보고 싶은
꽃술처럼 도도록 솟은 입술에 귀를 대고 가만가만
목울대 긴 병의 궤적을 따라 휘돌면
깊고 푸르게 생을 요약하는 소리
덜 비워진 병끼리 바닥을 기울이는 소리
온몸이 그만 푸릇푸릇 물들 것만 같아
그것은 명백히
병!이야 발음했어야 할 누군가의 혀가 첨벙,
멍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박음질도 없이 꼭꼭 여며진 몸
비워지고 채워지던 어디선가
파르르, 차디찬 화염이 치솟을 것만 같아
한 사람의 초라한 체온과 입김으로는
닿지 않을 저 깊고 우울한 곳, 거기
빈 무덤 하나 예약해 주시겠어요?
내일쯤 죽는 자가 될지도 몰라
병과 병의 안팎을 드나들던 세입자가
꼭 한 번, 주인 세대가 되어 볼 것도 같아
ㅡ등단작
비 내리는 법
이발소 남자가 면도칼을 들고 올라가 지붕에 걸린 구름의 뼈를 다 발라냈다
뭉쳤던 근육을 풀어주고 충치를 뽑자 소나기가 내렸다
귀를 열고 지켜보던 아래쪽 지붕들이, 창문과 나무들이 어느새 행복해진다
자장면 한 그릇 시켜먹은 빗줄기가 햇볕에 부르튼 지붕을 적시고 처마를 타고 내려와
갈라진 길바닥을 봉합한다 갑자기 분주해진 우산들이 고립된 길과 골목을 연결한다
아랫도리를 적신 자판기가 빗방울의 틈을 비집고 한 잔의 수증기를 날려 보낸 뒤
구십오 도의 체온 유지를 위해 재빨리 입을 닫는다
가위와 빗을 내려놓은 미용실 여자가 온수를 틀고 물의 온도를 읽자
고슬고슬 양털 퍼머로 모양을 낸 구름이 고분고분 머리를 들이민다
주머니에 손 찌르고 방관하던 바람이 두런두런 외출 준비를 하는 하오
누렇게 마른 입술 달싹거리던 샛강의 입이 건너편 뚝방까지 죽 찢어져 간다
ㅡ 등단작
몇 개의 재발견
새
부리로 받아 적고 날개로 지운다 공중은 함께 나눠 쓰는 그들만의 공간, 썼다 지웠다 판에 박힌 학습, 만 번의 비행을 거듭하고 있다
몸속 어딘가에 복제된 세계지도, 한 번도 써먹은 적 없었으므로 길을 잃어 본 적 없다
늑대
고독을 짜깁는 기술자, 한 음절의 울음으로 초승달의 여백을 채웠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전 인간의 유전자를 훔쳐 진화했던 탓에 대개 멸종된 종족
보름달이 뜨면 본성을 되찾는 무리다 술에 취해 우짖는 사람의 눈매를 닮았다
바람
산과 바다 구름 사이의 의견충돌이다 해소되기까지 몰려다니는 까닭에 부침이 심하고 변덕스럽다
때때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했을 때는 분분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입자를 분석해 보면 지구 곳곳의 표정을 검색할 수 있다
나비
허공에서 피는 꽃, 꽃의 영혼이다 절반의 웃음과 울음으로 건네는 사무치는 인사법이다 향기를 보고 깔깔대는 꼬마천사의 손뼉, 하느님의 작은 날개다
보고 있으면 눈이 다 해질 것 같은 다큐멘터리, 봄날의 폭설이다
연필
몸 밖으로 나온 혀다 검은 피로 진술 한다 상상력이 부족할 때면 종종, 몇 잔의 커피를 필요로 하나 짧아지거나 부러지면 칼에게도 베이는 것이 필연적이다
또르르 굴려보면 모두가 시험에 든 지금이 딱 그렇다
ㅡ 기 발표작
하얀 밀림
폴폴, 깁지 않은 그물코를 빠져나온다 공중 한복판 널따랗게 펼쳐진 깃을 털어내면 모두가 낯설다 유리창 너머 삭제된 광경을 덮어쓴 채 엎드린 지평 위로 물기 걸러낸 음표들, 한 호흡 뒤처져 맨발로 까딱까딱 목발을 거꾸로 짚고 서 있는 저 게으르고 반항적인 몸짓을 보라 서로 떠밀고 떠밀리며 엉켜 있는 바깥, 얼마나 녹아들고 싶었던 걸까 해쓱한 표정으로 지싯지싯 타오르고 있다 하얀 밀림의 입술로 뜨겁게 빨려든다 0°C로 가라앉는 고요한 열창, 빙긍빙글, 구름의 귀가 트인다 제 무덤을 향해 희끗희끗, 무장해제를 당한다 불쑥 불거지기도 하는 불협화음을 몸에 장착한다 스스로 지은 수의를 걸치며 짐짓 날개를 접는다 열어 줘, 열어 줘, 풍경의 뚜껑을 덮었나 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쓸쓸한 유감
ㅡ 기 발표작
천문
누가 토끼를 달 바깥으로 꺼내 놓았나 고삐라도 쥔 듯 은하를 몰고 다니더니 이마에 부서지던 별빛, 오늘에 이르러 청량한데
새는 요약된 공중, 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완성되었어라 다 해진 날개로도 권역을 이탈하거나 경직되지 않으니 새떼가 운용하는 천문은 날개로 풀어야 하는 것 돌출 한 부리로 끊임없이 기록하는 저 고지식한 운항일지
풍덩, 돌 한 덩이로 풀이한 운수도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종족놀이에 빠졌던 우물 안 개구리들 제법 골똘해진 것 아니겠니 절반쯤 심사숙고 하는 자세로 딱딱한 돌 속에 틀어박혀 외우는 주문이 왁자한데 돌께서 점지한 오늘의 운세는 개골개골, 봄밤에 기탄없구나
물거품이 자꾸 부풀어 오르니 물이 제맛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안절부절 숨 가빠하는 물고기들의 난항이 하늘에 닿았음에도 왈가왈부, 미루고만 있으니 아아, 신들도 권태에 몸부림치는구나 회의에 들었구나 그럴진대 한 번쯤 관행을 고치는 것도 힘에 부친 우리의 점괘는 생계형 근심주의자
ㅡ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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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함에 대하여
박승일의 시는 유려하다. 시에는 그 나름의 시적 질서 혹은 문법이 있다. 이 시적 질서에 어긋나면 언어는 생기를 잃고 세계는 매력을 잃게 된다. 신인의 경우 이 시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신인의 경우 이 시적 질서를 세우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시의 시적 세계를 전개해 나가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제 갓 등단한 시인의 시를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그만큼 신인에게는 시적 질서를 마련하는 일이 어려우며 그것이 부재한 상태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가 유려하다는 것은 적어도 이러한 시적 질서가 그의 시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시의 유려함은 시인의 상상과 그것을 드러내는 표현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지만 가능하다. 상상은 참신한데 그것의 표현은 진부하다거나 세련되지 못한 경우라든가 혹은 표현은 기발한데 상상이 진부한 경우가 있다. 상상과 표현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시는 어디 한 군데 덜어낼 수 없을 정도로 천의무봉하며, 그런 시의 경우 형식과 내용 또한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그의 시에서는 이러한 유려함의 기미가 엿보인다. 그의 시편들 중에 특히 「푸른 방」이 그렇다. 이 시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마침을 의미하는 표지 없이 한 호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의미의 선명성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인이 이 정도의 유려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을 보고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병의 외양에 대한 탐색만으로 불가능하며, 병의 이면에 은폐된 세계의 의미를 발견한 자만이 들추어낼 수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병의 열린듯 하지만 닫혀진 세계 속으로 자신의 의식을 깊이 투사해 저 깊고 푸른, 다시 말하면 " 한 사람의 초라한 체온과 입김으로는 닿지 않을 저 깊고 우울한 곳"의 세계를 건져 올린다. 좋은 시는 평범한 재료를 미적 질료로 바꿔놓고 있는 시를 말한다. 이것은 요리와 다르지 않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전혀 다름 맛을 내는 것과 시 쓰기의 과정은 닮은 데가 있다. 동일한 시적 재료를 가지고도 어떤 것은 그냥 재료로 남아 있고 또 어떤 것은 미적인 질료가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재료에 은폐된 미적인 질료를 시인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시인이 병을 보고 이러한 상상과 표현을 한 것일까?
시인의 이러한 시적 상상과 표현의 유려함은 「비 내리는 법」이나 「하얀 밀림」,「천문」등에서도 엿보인다. 이 유려함은 시인의 강점이며 이것을 더 구체화하고 심화하기 위해서는 표현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시인의 상상에 비해 표현이 선명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좋은 시는 유려할 뿐만 아니라 그 유려함이 또한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을 구사하거나 이것이 뜻하지 않는 혹은 막연한 어떤 미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는 많은 가능성을 은폐하고 있다. 가령 시인이 닿고 싶어 하는 " 깊고 푸른 방"이라든가 "체온과 입김으로 닿지 않을 저 깊은 우울한 곳" 은 그런 가능성을 은폐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의 시 한 편을 읽고 나면 또 다른 시 한 편이 궁금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은폐된 세계에 대한 매혹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ㅡ 이재복(평론가)
—《젊은 시 2012》문학나무
-http://cafe.daum.net/poemory(푸른 시의 방)
출처 : 시하늘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메모 :'퍼온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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